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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자동차 폭스바겐의 탄생

by janakuma 2022. 10. 3.

포르쉐 가문으로부터 시작된 폭스바겐은 대중적인 자동차와 고급 브랜드의 계열사를 거느린 독일의 자동차 브랜드입니다. 한 때는 히틀러의 압박에 의도치 않게 군수산업에 띄어 들었으나, 시작은 사람들에게 값싸고 좋은 품질의 자동차를 생산하여, 귀족이나 부유층들 만의 혜택이었던 자동차 보급을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자동차가 폭스바겐이었습니다. 오늘날, 독일의 국민 자동차라고 불리는 폭스바겐을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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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독일을 장악하고 있던 1933년에는 히틀러의 나치당이 대공황으로 발생한 실업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책들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실행한 계획 중 하나가 독일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자동차 도로 “아우토반”입니다. 히틀러는 국가 정비 사업을 펼치면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그의 철저한 계획에 의해 실업률을 대폭 낮추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굶주린 시민들은 히틀러의 정책에 환호하였고, 나치 정권의 점유율은 나날이 상승하게 됩니다. 나치당은 기세를 몰아 저소득층에게도 저렴한 비용에 다양한 레저를 즐길 수 있는 공공 레저 기관으로 KDF(KRAFT DURCH FREUDE)를 1933년에 설립하고, 저소득층 가정들은 형편상 레저 활동을 즐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기에 적립금만 내면 국가의 보조금을 더해 각종 공연 및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정책은 시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게 됩니다.

독일의 자동차는 상류층들을 위한 교통수단이었고, 당시 자동차의 가격은 매우 비쌌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들이 자동차를 구매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아우토반을 만들 만큼 자동차와 교통 인프라에 관심이 많았고, 서민들이 구매할 수 있을 정도의 가격과 성능이 좋은 자동차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히틀러는 그 꿈을 이루어 줄 자동차 업체를 찾기 시작했으며, 그의 자동차 콘셉트에는 요구 사항이 있었습니다. 패밀리 자동차로서 성인 2명과, 어린이 3명을 태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며, 아우토반에서 시속 100km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독일의 기후를 생각했을 때,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공냉 엔진을 탑재하고, 후륜구동 방식으로 만들어야 하며, 튼튼하고 천마르크를 넘지 않는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조건 중에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은 천마르크의 비용으로 자동차를 제공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 당시 독일의 자동차 회사들은 고급 라인의 자동차 제조만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바이 정도 구매할 수 있는 비용으로 자동차를 생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자동차 회사들은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절하게 됩니다. 하지만 국민 자동차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던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요구를 받아들여, 자동차를 제작하게 됩니다.

폭스바겐의 탄생

1938년 포르쉐 박사는 4년 동안 자동차 연구에 몰입하여, 딱정벌레 모양의 초기 모델을 선보이게 되었고, 히틀러의 조건을 만족한 초기 모델은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게 됩니다. 초기에 차량을 KDF WAGEN이라고 불렀지만 히틀러는 VOLKS WAGEN (국민차)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게 되었고, 폭스바겐은 히틀러와 포르쉐 박사에 의해 탄생하게 됩니다. KDF는 폭스바겐을 시민들에게 홍보하고 차량 구입을 위한 적립통장을 만들도록 권유했고, 저렴한 가격에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다고 생각한 시민들은 정립 통장을 만들어 50장의 쿠폰을 네 권에 채우면 차량을 인도받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1939년 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시민들이 적립한 돈은 전쟁에 사용되었고, 시민들에게 제공된 차량은 210대 정도였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군용 무기 개발이 시급했던 히틀러는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에게 군용차 개발을 요구했고, 폭스바겐을 생산하기 위한 공장은 군용차를 생산하기 위한 생산기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포르쉐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그의 이름을 딴 전차를 개발하게 되었고, 폭스바겐을 이용해 군용차로 개조하였을 뿐 아니라 지프차인 퀴빌바겐과 수륙양용 차량인 쉬빔바겐을 생산하게 됩니다. 

히틀러는 폭스바겐을 설계할 때 후륜형의 자동차를 요구했던 건 전쟁이 발생했을 때, 군용차로 운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적의 화기로 엔진을 보호하기 위해 후륜 엔진을 요구하였고 , 비어있는 앞부분에는 모래주머니를 담아 총알로부터 차량을 보호할 것을 미리 생각하고 설계를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시민들은 차량을 인도받기 위해 적립통장을 만들어 돈을 모았지만 히틀러의 전쟁자금을 도와준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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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1945년, 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고 폭스바겐 공장은 전쟁으로 인해 연합군 산하의 관리에 들어가면서, 위기를 맞게 됩니다. 포르쉐 박사는 회사를 포드에 매각하려 했지만 포드는 인수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아들 페리 포르쉐가 회사를 운영하게 됩니다. 포르쉐 박사는 독일의 군수품 생산을 도왔다는 명목으로 감옥살이를 하다, 1949년 페리 포르쉐는 보석금으로 아버지를 석방하였지만 1951년 뇌졸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비틀의 성공

전쟁 이후 폭스바겐 공장을 다시 세우고, 사용 가능한 장비를 이용하여, 차량 생산을 재개하면서 공급망은 점차 정상화되어갔습니다. 공급망이 정상화된 폭스바겐은 1945년 포르쉐 박사의 의도대로 저렴한 가격에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폭스바겐 TYPE1을 출시하였습니다. 폭스바겐 TYPE1은 독일에서 성공을 시작으로 해외로 진출하게 되었고, 미국에서는 비틀이라고 이름을 변경하여 차량을 선보이게 됩니다. 미국에서 대히트를 치면서 1971년에 연간 130만 대를 생산하고, 2003년 7월 2153만 대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단일 모델로서 세계 최다 판매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면서 비틀은 단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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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이후 폭스바겐은 “뉴 비틀”과 “더 비틀” 두 가지 모델을 출시했으며, 폭스바겐은 성장을 거듭하며 “아우디”, “부가티”, “람보르기니”, “벤틀리”, “포르쉐”, “스코다”, “세아트” 등 대중성 있는 브랜드뿐만 아니라 슈퍼카와 같은 고급 브랜드를 인수하면서 전 세계 1위 자동차 브랜드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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